양녕대군기신제는 자시(子時:11~01)에 상도동 지덕사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다른데와 달리 초헌관,아헌관,종헌관 집사들이 있습니다.
 제,집사들은 갓을 착용합니다.
 양녕대군 초헌관 종원 봉사손
 과일 중간중간에 약과 ,산자,과자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양녕대군 직접쓰신 남대문 현판(숭례문)
양녕대군의 종가는 차남 함양군 이포의 가계로 이어졌다. 이는 장남 순성군 이개가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예법상으로는 순성군이 일찍 사망한 경우, 그의 장남 오천부정(烏川副正) 이사종(李嗣宗)이 종가를 잇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사정이 달랐다. 당시 순성군에게는 적통의 아들이 없고, 첩 소생의 아들들만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세조는 “첩의 아들로써 대군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종가는 함양군의 후손들에게로 계승되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일로 인해 순성군의 장남 이사종과 함양군 일가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대를 거치며 성리학적 예법이 완전히 확립되자, 순성군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장자 계통이라 하여 종손 자격의 회복을 연산군에게 청원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9대손 이형까지 함양군 가계가 종가를 이어왔으나, 이형에게 후사가 없자 양녕대군의 셋째 아들 서산군 이혜의 8대손 이인망이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그런데 이인망과 이형의 항렬이 같아 논란이 일었고, 이를 계기로 순성군의 후손으로 종통을 다시 세우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 임금 숙종은 이인망을 파양하되, 그의 아들 이한보를 이형의 양자로 입적하도록 하여 항렬 문제를 정리하였다. 그 후로 종가의 직계는 이한보의 후손들로 이어지며, 현재의 양녕대군 종가는 혈통상 서산군의 후손들이다. 한편, 함양군의 후손 또한 지금까지 다수 남아 있다. 예컨대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이인수는 혈통상 함양군의 16대손이다. 양녕대군파의 11대 종주 이한보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직계 후손이다. [즉, 이한보부터 양녕대군의 종가와 동시에 임영대군의 후손들이기도 한다. 본부인 수성부부인 광산김씨에게서 3남 5녀, 첩실에게서 7남 12녀 등 총 10남 17녀를 두었다. |